1. 시작은 언제나 어설픈 삼월로부터
삼월은 어설프다.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초입이 뒤섞여, 찬바람과 햇살이 엇갈리는 계절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설픔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시작을 본다. 삼일절의 뜨거운 외침, 입학식의 설렘과 긴장, 경칩의 생명의 기척, 그리고 농사의 첫 삽질까지. 삼월은 세상 만물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들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조금은 서툴러도 괜찮은 이 계절을 좋아한다. 인생에서 삼월은 단순히 달력 속 날짜가 아니라 마음속 결심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주저하던 발걸음을 내딛는 그 찰나, 우리의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계절이 아니어도, 날짜가 아니어도,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이 바로 나만의 삼월이다.
이렇게 마음속에 봄이 꿈틀대기 시작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아련한 풍경 하나를 꺼내 보게 된다. 바로 푸르른 새싹이 돋아나던 그해 봄날의 교정이다.
2.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울려 퍼지던 풍금 소리
고교 시절 음악 시간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기억에 떠오른다. 꽉 막힌 교실을 벗어나 학교 교정에서 야외 음악 수업을 하던 날이었다.
플라타너스 잎이 너울거리며 해를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그 아래에는 낡지만 고운 소리를 내는 풍금이 놓여 있었다. 음악 선생님이 연주하는 풍금 소리는 봄바람을 타고 학생들의 노래와 어우러지며 더없는 봄날의 학창 시절을 빛내 주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우리는 그 수업 시간에 ‘사월의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한 명씩 노래를 부르게 하여 음정과 박자를 세심히 지도해 주셨다. 음정 하나, 박자 하나에도 진심을 다하시던 선생님의 모습, 그리고 친구들의 서툰 듯 맑은 목소리가 어우러지던 그 순간. 긴 여운이 남는 봄날의 교정은 이제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가물거리지만, 그 감동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3. 인생의 배경음악이 되어준 선물
선구자, 비목, 로렐라이, 아! 목동아, 즐거운 나의 집, 먼 산타루치아, 목련화…. 학창 시절 배웠던 그 가곡들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선율이 되어, 내 삶의 고비마다 조용히 흘러나와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 시절의 교정, 풍금 소리, 친구들의 목소리는 이제 시간 속에 묻혔다. 하지만 그 멜로디만큼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때로는 힘든 하루 끝에 위로가 되고, 때로는 잊고 있던 순수함을 되새기게 한다. 가곡 한 소절이 지나간 봄날을 불러오고, 그 봄날은 다시 나를 노래하게 한다.
어설픈 삼월에 시작된 나의 봄은 음악 선생님의 풍금 소리를 만나 비로소 완성되었다.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 시절의 가곡들은 우리의 감성을 키워준 선생님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노래하는 법을 알려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은 혼자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하고 부르면, 어느새 나는 다시 그 따뜻했던 봄날의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서 있다. 학창 시절의 음악 시간은 그렇게 내 인생의 아름다운 배경음악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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